[5편] 필요 이상의 짐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다
[편집자 주] 자신이 살아갈 미래를 꿈꾸고 인생을 설계하는 청소년 시기, 낯선 세계와의 조우는 그 설계도에 놀라운 변수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배움터 삼아 도전하며 차곡차곡 경험과 능력을 쌓아가며 갭이어 과정을 밟는 조이현 양이 산티아고 순례길 체험담을 전한다.
드디어 순례길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대자연의 고즈넉함이 대도시의 북적임으로 바뀌었다.
시끌벅적한 인파 저 너머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성당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광장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노을에 물들어 황금빛을 뿜어내는 아름답고 웅장한 대성당이 나를 압도했다. 성취감과 숨이 막힐 정도로 황홀한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다.
알베르게에 가서 짐을 풀고 어느덧 어두워진 골목을 지나 성당으로 돌아와 미사에 참석했다. 신비하고 장엄한 종교적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엄숙해지며 조용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음날 순례길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며 공항으로 갔다.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비행기가 육지와 멀어질수록 순례길이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순례길 위에서의 감동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도대체 산티아고 순례길의 무엇이 나를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일까. 나 자신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산티아고의 광활한 초원은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자연 속에서 인간이라는 나의 존재가 한 톨 먼지처럼 작게 느껴졌고, 그동안 품고 있던 걱정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문득 맹자의 ‘구방심求放心’, 즉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가장 편안한 상태로 자연을 느끼는 동안 나와 자연의 구분이 사라졌다. 순례길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마주하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깊이가 다른 평화를 체험하게 해 주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나란히 걷던 순례길에서 문득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졌다.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친구들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멀리 앞서게 되자 잠시 길가 담장에 기대어 앉아 쉬어가기로 했다.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쳤다. 손미나 아나운서가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완주하고 쓴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거야’라는 책이었다. 짐을 줄이려 여러 번 고민했지만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가져왔다.
순례길의 풍경, 음식, 사람들, 흥미로운 에피소드 등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었다. 잔잔한 바람이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스칠 때마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살랑거리며 마음에 깊은 평화가 깃드는 느낌이 들었다.
마주한 사람들도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다. 바르셀로나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가 무려 9시간 연착되었을 때 공항에서 장시간 대기하느라 지쳐가던 중 한 스페인 여자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녀를 비롯한 같은 비행기를 탄 스페인 사람들도 우리처럼 9시간을 기다렸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짜증과 피곤함 대신 여유와 즐거움이 가득했다. 나는 이때 다시 한번 스페인의 매력을 느끼게 됐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 가만히 앉아 있자 그제서야 어깨와 옆구리의 멍이 느껴졌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긴 시간을 걷다 보니 가방끈에 쓸려 멍이 들고 말았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이것저것 물건들을 챙겨 담느라 무거워진 배낭. 그러나 실제로 필요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쩌면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 길에서 무엇인가 큰 것을 얻으려 하고,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정작 순례길에서 얻은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는 법이었다. 순례길 높고 푸르른 하늘을 마주하며 떨쳐놓고 온 걱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걱정과 불안을 내려놓고 가벼워진다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에 닿는 순간 문득 결심이 섰다. 언젠가 꼭 다시 이곳에 돌아와야겠다고.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전 구간을 천천히, 온전히 걸어 보고 싶다. 나는 아직 산티아고와 충분히 만나지 못했다. 나 자신과의 만남에도 아쉬움이 남아있다.
담장에 기대앉아 읽던 책 속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언제 걸을 것인지는 당신의 선택이 아니다. 그 길은, 때가 되면 당신을 부를 것이다.” 그 부름에 응답할 날이 벌써 기다려진다.